이혜림의 <소소일상> / 반전드라마
이혜림
| 2025-10-27 14:31:27
추석연휴를 앞두고 날씨가 갑자기 선선해졌다. 길고 길었던 더위가 끝나고 본격 가을이 시작되나 싶을 때 여름엔 보이지 않았던 떡볶이 트럭이 약국 앞에 서 있었다.
바람에 가을 한기가 실리고, 마침 허기가 지기도 얼른 달려가 한 꼬치 잡아들고 따끈한 국물을 한 컵 떠서 식기를 기다렸다. 노부부가 운영하셨는데 여사장님은 트럭 위에 앉아 떡볶이를 젓고, 아직 남사장님은 고단하셨던지 운전석에 앉아 눈을 붙이고 계셨다.
예전엔 참 흔했던 이런 노상 점포가 많이 줄어 요즘은 붕세권(붕어빵을 일상적으로 사 먹을 수 있는 범위) 이란 말도 생겼다. 김 폴폴 나는 어묵과 붕어빵이야 말로 쌀쌀한 계절의 맛일텐데 그 사라져감이 무척이나 아쉽다.
어묵을 후후 불어 한입 먹었을 때 ‘딸랑’ 하고 약국 문이 열리더니 단발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을 끼고 흰가운을 입은 약사님이 나오셨다. 약사님은 한창 손님을 받고 있는 여사장님을 흘끗 보시더니 트럭 앞쪽으로 가 남사장님의 단잠을 깨웠다.
“사장님! 바쁘세요? 잠깐 약국으로 들어와보세요.” 목소리에 찬바람이 쌩 불었다. 남사장님은 당황하지도 않고 느릿한 말투로 “왜? 혼내게?” 하셨다. 익숙하신 건가? “네. 지금 바로요.“ 약사님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돌려 다시 약국으로 들어갔다.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역할들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딱 저런 분을 모델로 한 거겠지 싶었다.
사장님은 느릿느릿 차에서 내려 축 쳐진 어깨로 약국으로 들어가셨다. 어묵을 씹고 있지만 내 신경은 온통 약국 안으로 쏠려 누가 어묵을 고무로 바꿔놓아도 몰랐을 것 같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안의 상황은 볼 수 없었지만, 뭐 안봐도 비디오, 아니 안 봐도 유튜브 아닌가.
이제 다음 주 부터는 이 트럭 못보겠네, 트럭이 약국을 가리니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참 야박하네, 사장님들 나이도 많으신데. 짧은 시간동안 잘 알지도 못 하는 약사님이 참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몇분이나 흘렀을까.
다시 ‘딸랑’하고 약국 문의 종이 울리고 사장님이 나오셨다. 그런데 들어갈 때의 축쳐진 어깨가 아니라 단단히 힘이 들어간 어깨로 양손에 금색 보자기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나오시는게 아닌가! 트럭 위에 앉아 계시던 여사장님도 눈이 동그래지셨다.
”아니 그걸 왜 우리를 준대요?“
”추석이라고.”
사장님은 머쓱하게 답하고는 조수석에 선물을 실으셨다. 아 이런 반전이라니!
긴 추석연휴를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와 2주만에 가보니 약국 앞 그 자리에 여사장님은 여전히 떡볶이를 젖고 계시고, 남사장님은 잉어빵을 굽고 계셨다. 나는 약국을 슬쩍 들여다 보며 ‘미안해요 약사님, 앞으로 약은 여기로 사러 올게요. ’ 하고 마음으로 사과했다.
일상은 때로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 하고, 빌런 만큼이나 선한 이웃도 많다. 이런 기분 좋은 반전을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런 반전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글.이혜림(읽고 달리기를 좋아하며,
마침내 쓰는 사람으로 살고싶은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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